벨푼트의 호숫가 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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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


슈베르트 현악 4중주 14번 '죽음과 소녀(Death and the Maiden)'

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String Quartet No. 14 in D Minor 'Death and the Maiden' D. 810 (1824)



'죽음과 소녀'. 이 곡을 제가 처음 접했던 것은 대학교 1학년때였습니다. 당시 저는 슈베르트는 거의 가곡만 작곡하는 사람인 줄만 알았던, 철없던^^;; 시절이었죠. 처음에는 특이한 제목 때문에 이 곡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네요. 현악 4중주의 제목 치고는 상당히 화려(?)하죠. :) 이유인즉슨, 이 곡은 슈베르트가 작곡한 동일한 제목의 가곡에서 멜로디를 따 와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가곡들은 시, 소설, 희곡 등에서 그 내용을 따온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 제목이 상당히 다양하죠. 이 '죽음과 소녀'라는 모티프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그 뿌리는 그리스 신화 중 하데스에게 납치되는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라고 하네요. (관련 페이지: Patrick Pollefeys의 Death and the maiden)


이 곡에 반한 저는 당시 음반점에 가서 이 곡의 음반을 그냥 처음 보이는 아무걸로나 쓱 집어서 사 버렸습니다. EMI에서 나온 Alban Berg Quartet의 연주가 바로 그것인데요, 시장에 나온 수많은 '죽음과 소녀' 연주 중에서도 저에게는 가장 마음에 드는 연주입니다. 이 연주의 매력은... 바로 넘쳐나는 '힘'입니다! 현을 끊어버릴듯한 파워 넘치는 보잉은 다른 연주에서는 찾기 쉽지 않더군요. 퍼스트 바이올린의 역할이 아주 중요한 슈베르트 실내악곡에서 이 사중주단의 퍼스트 바이올린은 정말 넘쳐나는 강렬한 사운드를 자랑합니다. 매운 맛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은 그보다 덜 매운 것은 싱거워서 못 먹는 것처럼, 저도 이 연주에 중독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명반이라 꼽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 Busch Quartet의 연주조차도 '너무 살살 연주하네'라는 생각에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기억이 있네요 --;;;


* 슈베르트에 대해
흔히 '요절한 천재 작곡가'라고 하면 모차르트(1756~1791)만을 떠올리기 마련인데요, 이 슈베르트도 모차르트의 아성에 미칠 정도는 아닐지라도 나름대로의 천재적 재능을 지닌 작곡가입니다. 특히 리스트는 그를 가리켜 "역대 작곡가 중 가장 시(詩)적인 음악가"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또 모차르트보다도 짧은 생애(!) 동안 남긴 600여곡의 가곡과 더불어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오페라, 교향곡, 실내악곡 등의 목록을 보면 그의 굉장한 작곡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말년 작품의 대부분은 그의 생전에는 출판조차 되지 않았으며 훗날 슈만, 멘델스죤 등에 의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의 짧은 인생은 가난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결혼도 못하고 홀로 차가운 하숙방에서 외로이 작곡에 몰두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위대한 예술가의 슬픈 현실이네요 ㅠ.ㅜ

제가 이전에 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관련 글에 그의 삶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적어 놓았으니 참조하세요. :)


* D 번호는 무엇입니까?
슈베르트의 작품에 붙는 D. 라는 번호는 Otto Erich Deutsch라는 사람이 만든 연대기 번호입니다. 흔히들 클래식 곡에 Op. 라는 Opus 번호가 붙는 것과 마찬가지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요, 특정 작곡가들은 이런식의 번호가 붙는 경우가 있죠. 또 다른 예로 모차르트의 작품은 K 또는 독일식은 KV 번호가 붙는데, 이것 또한 Ludwig von Koechel이라는 사람이 작성한 연대순 작품 번호입니다.


* 곡 감상
I. Allegro
시작이 너무나도 강렬한 악장입니다! 처음 두 마디의 강렬함에 깜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 주듯이 조금은 조심스런 멜로디로 한 숨 돌린 후 다시 강하게 나갑니다. 상당히 긴 악장동안 계속해서 밀고 당기면서 어둡고 긴장된 분위기를 놓지 않습니다. 그 강렬함이 참으로 인상적이죠.

II. Andante con moto
주제와 변주 형식입니다. 주제는 슈베르트가 이전에 작곡하였던 가곡에서 따온 애절하면서 어딘가 모르게 음산한 멜로디입니다. 가장 윗 부분에서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는 퍼스트 바이올린을 배경에 둔 채로 다른 악기들이 주제부를 연주합니다. 슈베르트가 가곡 작곡가여서 그런지 이런 식으로 퍼스트 바이올린을 혹사(?)시키고 나머지 악기들이 조용히 반주하는 형식이 가끔 눈에 띕니다. 가곡은 멜로디 + 멜로디보다 튀지 않는 반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니까요.
여러 변주들을 거친 후에 다시 조용해지며 첫 주제로 돌아와 아주 조심스럽고 차분한 마무리를 짓습니다.

III. Scherzo. Allegro molto
거칠고 빠른 스케르초입니다. 반면 중간의 트리오 부분은 아주 서정적이며 부드럽죠. 앞에서 혹사;;당하던 퍼스트 바이올린은 여기 트리오에서도 혼자 상당히 바쁩니다. ^^ 다시 처음의 거친 멜로디가 반복되면서 4악장으로 이어집니다.

IV. Presto
악장이 끝날때까지 정말 쉬지 않고 달려가는 빠른 악장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곡이 전체적으로 그런 분위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마치 휘몰아치는 폭풍과도 같은...) 3악장의 스케르초에서도 사용되는 기법이지만 4악장에서 중간중간 네 악기가 순간적으로 같은 음을 내는 패시지들이 있는데, 이로 인해 곡의 강렬한 느낌은 더욱 증폭됩니다.


* 참고 - 관련 영화
이 곡에 대한 자료를 찾다 보니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Death and the Maiden"에 대한 자료가 있더군요.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곡이라 영화도 한 번 보고 싶기도 한데... IMDb 자료는 이곳을 클릭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핑백

  • 벨푼트의 호숫가 산장 : 음악 문답 릴레이 2012-01-14 01:57:21 #

    ... 로디와 서정적인 가사의 아름다운은 정말 압권입니다. 4. 즐겨듣는 노래 내지는 사연이 얽힌 노래를 5곡 꼽아본다면? (1) 슈베르트, 현악 4중주 14번, "죽음과 소녀" 슈베르트의 무거운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 클래식의 전례와 상반되게 4악장 모두가 단조로 되어 있는 어둡고 힘 ... more

덧글

  • 스머프매니아 2004/11/12 11:39 # 답글

    이런 글을 볼때마다 제가 음악 편식 하고 있다는걸 절실히 느낍니다...
    원체 피아노 곡 말고는 아는곡도 들어본 곡도 들어보고자 하는
    마음도 없으니요....
    여러 블로그 다니면서 추천하시는 곡들은 좀 들어봐야겠군요...
  • 相顯 2004/11/12 12:39 # 삭제 답글

    말씀하신 넘쳐나는 힘! 이라는 말이 딱이군요. :)
    이걸 듣고 다른 작곡가들의 Quartet을 들어보면 이 곡이 정말 얼마나 구성지고 짜임새있고 매력적인 음악인지 깨달을 수 있죠.(저는 그렇더군요;)
    각 악장마다 매력적인 주제가 있고 흐트러짐 없이 시종일관 치밀하게 음악을 이끌어나가는데 정말 괜히 유명한 Quartet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 mayura 2004/11/12 14:08 # 답글

    으하하;ㅅ; 죽음과 소녀 정말 좋아해요.
    어제 올리신거 봤지만 어제는 제가 좀 죽어가던 상태여서(....)
    가난한 슈베르트 이야기라면 역시 오선지도 못 구해서 힘들어 했다는게 가장 먼저 생각나요. 풍요로운 환경이 재능의 발견과 성장에 여유를 줄수는 있지만 가장 중요한건 본인의 열정과 의지가 아닐까..
    역시 슈베르트의 감성은 따뜻해서 좋습니다^_^;
  • anakin 2004/11/12 17:08 # 답글

    스머프매니아 님 // 클래식 음악의 세계가 근데 워낙 넓어서요.. 명곡은 많고 시간은 없죠^^ 자신이 익숙하고 좋아하는 분야의 음악을 더 자주 듣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거라 생각해요. 저 또한 바이올린 곡에 편향된 경향이 있어서요;;;
    相顯 님 // 정말 힘이 넘치는 곡이죠 :) 이 현악 4중주는 단순히 가곡만 만들 줄 아는 작곡가의 작품이 절대 아니라고 자신있게 선언할 수 있습니다. -o-/ 슈베르트 음악이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시적인 주제를 물흐르듯 펼쳐가는 자연스러운 구성일 거에요.
    mayura 님 // 저런;; 오늘은 살아나셨나요? :o 모차르트는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서 가난하였다는 이미지라면 슈베르트는 벌이 자체가 없어서 가난한, 그야말로 빈털털이의 이미지죠 ㅜ.ㅠ 말씀하신대로 본인의 열정과 의지,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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