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푼트의 호숫가 산장

lunarsix.egloos.com



Loom,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시작에 앞서: 가장 최근 표기법으로는 '차이콥스키'가 올바른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차이코프스키'의 표기가 훨씬 마음에 드는 관계로, 이 글에서는 이렇게 쓰겠습니다. 혹시 이게 거슬리는 분께는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__)




룸(Loom)은 90년대 어드벤쳐 게임의 명가였던 루카스아츠 사의 어드벤쳐 게임이죠. 1990년에 발매된 게임으로, 오늘날의 게임들과 비교해 보면 외관상 여러 가지로 부족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시 기술력을 고려해 볼 때에 많은 정성이 들어간 작품이고, 부족한 부분을 플레이어의 상상력으로 채워 가며 더더욱 높은 몰입감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룸의 모든 음악은 러시아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발레곡 '백조의 호수'에서 따 온 것들입니다. 네, 게임에 나오는 곡들은 단 한 곡도 빠짐 없이 원 곡을 최소한의 편곡을 통해 거의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게임 내에서 별다른 이질감이 없다는 점은 참 신기하죠.

그리고 그렇게 이용된 원래의 음악들에 대해 이 글을 통해 간략히 살펴 보려 합니다.



웬지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 선수를 치면요...

백조의 호수 cd가 집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봤는데 룸에 나오는 곡들 중 일부밖에 없더라고요? 그렇다면, 갖고 계신 cd는 백조의 호수 발레 전체를 수록한 것이 아닌 백조의 호수 모음곡(Swan Lake suite)일 확률이 높습니다. 특히, 들어있는 곡들이 총 여섯 곡이라면 그건 거의 100% 이 모음곡 음반입니다.

백조의 호수 발레 전체는 2시간 반~3시간의 연주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유명한 곡 몇 개를 뽑아 모음곡으로 묶어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렇게 나온 음반도 많이 있고요.



시작하기 전에 한 마디만 더 덧붙이면, 이 배경 음악들은 룸의 디스크 버전에서 모두 들을 수 있고, cd 버전에서는 용량상 일부가 생략되어 있는 듯 합니다. 고로 디스크 버전 룸을 처음부터 끝까지 플레이한 영상 링크를 하나 첨부합니다. 유튜브의 SaikyoMog라는 분의 영상 링크입니다. 이 영상에서 각 곡이 나오는 부분의 링크를 걸어 놓았으니, 기억이 안 나시는 분께서는 링크를 눌러 직접 들어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잡설은 이만 줄이고, 실제 음악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할까요? ^^

* 메인 테마 (0:12)
No. 4: Pas de trois
I. Intrada: Allegro



룸을 실행하면 가장 먼저 듣게 되는 음악, 메인 테마입니다. 그 이외에도 엔딩과 여러 컷신에서 들을 수 있죠. 타이틀에서 시작된 음악은 주인공 보빈(Bobbin Threadbare)이 깨어나는 장면까지 이어져, 보빈이 마을로 내려갈 때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아르페지오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하프의 선율을 배경으로 목관과 현악이 주 멜로디를 주고받다가 가장 마지막 클라리넷의 긴 트릴과 현악의 피지카토가 아름다운 꿈결 같은 곡을 마무리 합니다.

곡 자체의 아름다움과 게임 내에서의 비중 덕에 많은 분들에게 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이리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게임을 처음 실행했을 때 별빛이 가득한 밤 하늘에 LOOM이라는 글씨가 주욱 뿌려지면서 (네, xt 컴퓨터에서는 이게 바로 뜨지 않고 옆으로 주욱 뿌려졌었죠;;;) 이 음악이 나오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원로 의회와 헤첼 유모 (3:18)
No. 27: Danses des petits cygnes: Moderato


보빈이 세 명의 원로들과 헤첼 유모(Mother Hetchel)의 대화를 엿듣는 장면에서 나오는 음악입니다. 헤첼의 죄를 벌하는 대화의 내용과, 이어 보빈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마을을 떠나가는 등의 사건들로 인해 게임 내에서는 꽤 어두운 느낌을 받게 되는 곡인데, 발레에서의 제목은 "Danses des petits cygnes", 번역하자면 '작은 백조들의 춤'입니다. 게임에서 느껴지는 느낌과는 조금 다르죠? ^^

덧붙여, 앞에 붙은 숫자 27을 보고 짐작하실 수 있겠지만, 실제 발레에서는 거의 막바지에 나오는 곡입니다. 게임 상에서는 테마에 이어 두 번째로 듣게 되는 배경 음악이지만요.



* 유리 제작자 길드의 도시, 크리스탈가드 (22:38)
No. 13: Danse des cygnes
IV: Allegro moderato



유리 제작자 길드의 도시, 초록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크리스탈가드에 처음 도착할 때에 나오는 음악입니다. 영상에서는 아쉽게도 순간이동을 위한 종을 너무 빨리 울리는 바람에 음악이 중간에 잘렸군요.

이 곡은 위에서 언급한 모음곡 음반에도 있는 곡이고, 그 이외에도 짧고 빠른 곡이라 많은 분들이 귀에 익으리라 생각되네요.

바순이 깔아주는 반복되는 저음 위로 오보와 플룻이 주제를 이끌고, 이어 현악이 넘겨받아 주 멜로디의 나머지 부분을 거의 맡게 되고, 주제가 다시 한 번 나오면서 마무리 코다 부분으로 넘어가는 구성입니다.



* 양치기 길드 (34:18), 하늘을 나는 보빈 (39:35), 동굴을 탐험하는 보빈 (43:47)
No. 6: Pas d'action: Andantino quasi moderato - Allegro


곡의 전원적인 느낌과 잘 어울리는, 양치기 길드를 만나는 부분에서 나오는 곡입니다. 위에 링크된 플레이스루 영상에서는 양치기 길드에 도착하자마자 양치기를 깨우면서 음악이 중간에 잘리는데, 전 곡을 듣고 싶으신 분께서는 동굴을 탐험하는 보빈 링크를 통해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두 번째 링크에서 나오는 좀 더 빠른 속도의 곡은 새로 편곡된 것이 아니라, 원곡의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끝까지 들어보세요!

낮은 음의 현악과 금관이 곡의 전원적인 주제의 시작을 맡고, 이어 목관과 높은 음의 현이 옥타브를 올려 같은 주제를 연주합니다. 마지막 Allgro 템포의 코다 부분은 현악의 주제에 금관과 타악기까지 총동원되어 신나고 박진감 넘치게 마무리하죠. 이 부분이 바로 위에서 제가 링크한 '하늘을 나는 보빈' 파트겠고요.

사족으로, 룸에 나오는 곡들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입니다 ^^;;;



* 대장장이 길드의 도시, 포지 (51:01)
No. 4: Pas de trois:
IV: Moderato



무쇠를 녹일 정도의 뜨거운 열기로 언제나 가득한 도시, 대장장이 길드의 도시인 포지에 들어가면 들을 수 있는 곡입니다.

메인 주제 뒤로 금관이 넣어주는 빵빵한 코드는 마치 달궈진 쇠를 힘차게 두드리는 대장장이들의 망치 소리와 같은 느낌이 들죠. 중간에 목관끼리 서로 주고받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부분을 지나, 처음의 주제가 다시 한 번 나오면서 곡은 마무리됩니다.

이 곡은 (아래 맨디블의 성전과 함께) 메인 테마와 같은 4번을 달고 있는데, 4번 곡 Pas de trois는 각기 독립된 발레로 구성된 서로 다른 곡들이 하나로 모여 있는 형태라 그렇습니다.



* 맨디블의 성전 (59:12)
No. 4: Pas de trois:
II: Adagio



세상을 지배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는 주교 맨디블의 성전에서 들을 수 있는 곡입니다.

오보의 멜로디를 한 마디 늦은 바순의 저음이 받쳐주는 첫 주제 이후 저음 현악에서 이어 받고, 또 고음 현악까지 자연스럽게 멜로디는 흘러갑니다. 다시 한 번 첫 주제가 나온 후 플룻과 클라리넷이 마지막 마무리를 살짝 장식하는 구성이죠.

살짝 연관이 없는 얘기긴 하지만, 게임 내에서는 맨디블과 코브 이외의 성직자 길드의 멤버를 전혀 볼 수가 없는데, 나머지 길드 멤버들은 맨디블의 계획에 별다른 이의가 없었던 건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



* 케이오스와의 결전 (1:21:27)
No. 29: Scene finale: Allegro agitato

(게임에 나오는 부분은 1:20 정도부터 나옵니다)

게임의 최종 보스, (성별이 불분명한-_-) 케이오스와의 대결에서 나오는 음악이죠. 케이오스가 헤첼 유모에게 거는 마법에 계속 대항하면서 케이오스가 룸을 차지하는 것을 막아야만 하는 긴박한 상황에 어울리는 곡입니다. '백조의 호수'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이 메인 테마를 변형한 멜로디라는 것을 쉽게 아실 수 있을 테고요.

마지막 장면인 만큼, 모든 악기들, 특히 좀 더 조용한 분위기의 곡들에선 제대로 듣기 힘들었던 금관이 총출동하여 웅장하고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해 냅니다. 멋진 발레의 대 마무리로 정말 부족함이 없는 곡이라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룸에 사용된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발레곡들을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원곡과 게임에 나오는 곡을 비교해 들어보시면, 원곡을 거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두 작품이 공유하는 '백조'라는 테마와 마법과 환상이 공존하는 세계라는 점에서 별 이질감 없이 음악이 게임에 녹아들어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룸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기회가 되면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발레 전곡 음반을 구해서 전체를 한 번 감상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것이 너무 길다면 위에서 제가 살짝 언급한 부담없는 길이의 모음곡 음반부터 시작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클래식 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으시다고요? 클래식은 너무 어려운 음악 같다고요?

하지만, 처음부터 클래식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는 법이죠. 관련 지식이 높은 경지에 올라 있는 분들도, 대부분 처음에는 관심있는 곡 하나부터 시작하여 천천히 확장해 나갔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있어 그 계기가 되는 작품이 룸, 그리고 차이코프스키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요 :)


더 많은 분들이 어드벤쳐 게임과 클래식 음악을 사랑해 주셨으면 하는 저의 작은 바람을 말씀드리며, 어드벤쳐와 클래식 음악의 멋진 융합, 룸의 배경 음악에 대한 잡설을 이만 줄입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핑백

  • 벨푼트의 호숫가 산장 : Loom cd판 엔딩을 보았습니다 2012-08-21 09:16:07 #

    ... 제가 이 게임의 배경 음악들에 대해 작성하려다 완성 못한 글이 하나 생각나네요. 가까운 시일 내에 완성해서 올려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12/08/21 수정: 완성한 글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그럼 이제 이 세계에서는 언제나 하늘에 초승달이 떠 있는 걸까요? 낮에도? --a ... more

덧글

  • 매드캣 2012/08/21 09:29 # 답글

    LOOM을 처음 접한게 초등학생때였는데 그래픽도 그래픽이지만 음악이 정말 매력적인 게임이었지요. 그 음악이 클래식 음악이라는 사실을 안건 먼 훗날이지만요.
  • FlakGear 2012/08/21 10:33 # 답글

    그때 했을때는 이제서야 '도트 판타지를 충족'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었던 게임이죠. 고전게임의 환상을 만끽할 수 있었고 지금은 더한 환상을 찾기 힘들더군요. 어드벤쳐 게임은 쥐약이라 게임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분위기와 배경, 음악은 고전이지만 제 상상과 환상을 충분히 충족시켜줬습니다.
  • 쑤현파파 2012/08/21 23:49 # 삭제 답글

    와~ 이건 머 룸 OST 리뷰네요...^^ 오래전 보았던 영화의 OST를 듣고 다시 영화를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리뷰... 제가 오히려 감사하네요...^^
  • anakin 2012/08/22 15:20 # 답글

    매드캣 님 // 말씀대로, 여러 가지 면에서 정말 아름다운 게임이라 생각합니다.
    FlakGear 님 // 루카스 게임 중에서도 가장 환타지 장르에 근접한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쑤현파파 님 // ost 리뷰라고 하기엔 참 부족하고, 그냥 듣기 편하게 링크 찾아 걸어놓고 간단히 소개를 하는 수준이죠뭐.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
  • lovely 2012/09/10 19:31 # 삭제 답글

    최근에 loom을 다시 접하고...원곡을 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제목을 찾고 있었는데 딱 제가 원하던 정보가 이 글에 있네요.
    포스팅 작성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감사합니다!
  • anakin 2012/09/11 12:57 #

    lovely 님 // 아,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기분 좋네요 ^^ 즐감상 하세요!
  • 테드 2014/12/19 15:49 # 삭제 답글

    아마 중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룸을 플레이할 당시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게임이라기 보다 책을 한권 읽는 느낌이었어요.
    전 음악을 잘 기억하는 편인데, 특히 메인 테마 곡은 한참을 입으로 웅얼거렸던 적이 많아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ㅎㅎ)
    한참 후 대학 때 우연한 기회로 난생처음 발레 공연인 백조의 호수 발레를 보게 되었을 때 다시 듣게 되었는데 그때 그 전율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곡이 이 곡이었구나... 요즘은 웅얼거리는 멜로디만으로도 곡이 뭔지 찾아주는 기술이 널렸지만, 당시에는 그런게 없었던 관계로 찾아볼 엄두 조차 못냈는데, 발레를 보니 백조라는 공통점으로 가슴 속에 꽂히더군요. 지금 저에겐 차이코프스키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로 남아있고, 이제 돌을 맞는 우리 아이에게로 이어지네요. 태아 때 차이코프스키와 국악을 계속 들었는데, 태어나서도 플레이해주면 가만히 들으며 아주 좋아합니다.

    훌륭한 글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아울러 기억까지 되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anakin 2014/12/20 03:36 #

    테드 님 // 아아, 즐겁게 보셨다니 저도 기쁘네요 ^^ 칭찬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있어서도 룸은 여러 추억이 얽혀 있는 작품이죠. 과거 추억 속에 다소 미화된 부분도 없진 않겠지만, 오늘날의 대예산 게임들도 이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은 드물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제 분께도 고전 음악의 아름다움을 꾸준히 전해 주세요! :D
  • 아이리스 2014/12/21 17:26 # 답글

    사운드카드가 없었던 XT 시절에 PC 스피커로 흘러나오던 배경음악이 좋아서 커다란 카세트 레코더를 갖다놓고 녹음하던 기억이 나네요. 어렸을 적이라 어디서 많이 들은 음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제대로 다시 들어보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 anakin 2014/12/25 06:39 #

    아이리스 님 // 룸 ost는 많은 분들의 추억 속에 남아 있는 곡이라 생각해요. 제 글을 즐겁게 보신 것 같아 저도 기분 좋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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