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푼트의 호숫가 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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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

독일 작가 쥐스킨트의 단편 소설입니다. 쥐스킨트의 작품은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하나하나가 굉장히 스타일리쉬하고 개성 넘치는 매력이 있어 제가 매우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이 책에는 단편 소설 '깊이에의 강요'와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 그리고 에세이 '문학적 건망증'의 네 편의 글이 있지만, 여기서는 '깊이에의 강요'에 대한 이야기만 하기로 합니다.

이 소설은 어느 여류 화가가 자신의 작품이 '깊이가 없다'는 평론을 듣고 이에 집착하다가 결국은 자살하는 비극적인 내용입니다. 작가 쥐스킨트는 매스 미디어를 극도로 기피하고 다른 이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 놓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인 '좀머씨 이야기'에서 좀머씨가 사람들에게 "제말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 두시오!"라고 외치는 장면이나 '비둘기'에서 오직 홀로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지내는 주인공의 모습은 실제 쥐스킨트의 모습의 반영이라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일관성 없는 의미없는 비평만을 내놓는 일부 평론가들에 대한 쥐스킨트의 불만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깊은 고뇌와 고민을 통해 여류 화가가 이루어 낸 것은 오직 스스로의 몰락이었다는 것, 그녀의 '깊이'에 대한 비극적인 집착을 유도한 것은 평론가의 '전혀 깊이 없는' 비평이었다는 것에서 묘한 인생의 모순이 느껴지죠. 이러한 아이러니가 바로 쥐스킨트 작품의 매력이 아닐까요. :)


오늘날의 블로그 환경에 이 이야기를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자신의 블로그의 글들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가 없다고 해석하면 지나친 확대일까요? 어디서 읽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한 블로그의 가장 큰 독자는 블로그의 주인 자신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아무리 방문객 수가 0이 되더라도 저는 이 곳에 들어와 예전에 제가 쓴 글들을 읽으며 추억에 젖어들 수 있을테니까요. 저는 제가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는 것이 꽤나 즐겁습니다. ^^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마지막으로... 그냥 문득 생각나 써 본 '깊이에의 강요'의 블로그 버전입니다. --a ('깊이에의 강요' 원본을 먼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글을 썩 잘 쓰던 모 가입형 블로그 출신의 한 여인이 처음 블코올블에 가입하면서 어느 평론가에게 이런 리플을 받았다. 그는 악의적인 의도는 없었고, 그녀를 북돋아 줄 생각이었다.
"당신 블로그의 글들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평론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젊은 여인은 그의 리플을 곧 잊어버렸다. 그러나 두 시간 후 바로 그 평론가의 비평 포스트가 올블 순위권에 올랐다.
<그 젊은 여류 블로거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젊은 여인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쓴 글들을 다시 읽어보고 수정 버튼을 눌러 html 코드까지 들여다보았다. 이전에 올린 포스트뿐 아니라 현재 올리려고 구상 중이던 포스트까지 전부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웹브라우저를 끄고 시작->시스템 종료를 한 후 산책하러 나갔다.
그날 저녁 그녀의 블로그에는 여러 사람이 방문하였다. 사람들은 평론가의 비평 포스트에 있던 링크를 타고 와서인지 그녀의 글들이 첫눈에 일깨우는 호감과 많은 재능에 관해 연신 리플을 달았다. 그러나 그들의 블로그로 가서 최근 글들을 깊게 읽으면 그녀 모르게 하는 말을 젊은 여인은 읽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깊이가 없어요. 사실이에요. 나쁘지는 않은데,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어요."
그 다음 주 내내 그녀는 전혀 블로그에 글을 올리지 않았다. 말없이 블로그에 접속하여 멍하니 F5만 누르고 있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것은 일부 사이트들에 간혹 출몰하는 무지막지한 도배자처럼 나머지 모든 생각들을 그녀의 머릿속에서 밀어내어 삼켜 버렸다.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
두 번째 주 그녀는 다시 포스트를 올리려 시도했다. 그러나 어설픈 잡담이 고작이었고, 때로는 글 한 줄 적지 못하는 적도 있었다. 마침내는 온몸이 떨려 마우스로 '글쓰기' 버튼을 누를 수조차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소리질렀다.
"그래 맞아, 나는 깊이가 없어!"
세 번째 주 그녀는 유명 블로거들의 블로그를 연구하고 블코올블을 두루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블로그 이론 관련 서적들도 읽었다. 블코 탑5에서 그녀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으로 따라갔다. 김중태님의 글 앞에서 불쑥 앞으로 나선 그녀는 질문 리플을 달았다.
"실례지만, 이 글에 깊이가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곧 누군가의 답리플이 달렸다.
"나를 놀리실 생각이라면, 그보다는 더 나은 것을 생각하셔야죠."
다른 이들도 비웃는 리플들을 달았다. 젊은 여인은 브라우저 창을 닫아버리고 몹시 비통하게 울었다.
젊은 여인은 점점 이상해져 갔다. 자신의 블로그에 계속 접속한 상태였지만 글을 쓰지는 않았다. 깨어 있기 위해 약을 먹으면서도, 무엇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피곤해지면 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들었다. 술을 마시고 면식을 시작했고, 밤새도록 불을 켜두었다. 글은 더 이상 쓰지 않았다. 한 방문객이 어느날 접속하여 글 몇 개를 출처 표기와 함께 퍼가고 싶다고 했을 때, 그녀는 답리플을 달았다.
"나를 내버려두란 말이에요! 나는 깊이가 없어요!"
한때 그렇게 글을 잘 쓰던 젊은 여인은 순식간에 영락했다. 운동 부족으로 몸은 비대해졌으며, 알코올과 약물 복용, 면식 때문에 유달리 빠르게 늙어 갔다. 그녀의 블로그는 날로 방문객이 줄어 갔다.
하루 평균 방문객이 0이 되자, 그 여인은 자신이 올렸던 포스트들을 전부 수정하여 외계어로 채워넣었다. 그리고는 인터넷 광케이블 전송탑으로 올라가 139미터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이날 바람이 몹시 거세게 불었기 때문에 그녀는 탑 아래 타르 포장된 광장에 떨어져 으스러지지 않고 넓은 귀리밭을 가로질러 숲 가장자리까지 날려가 전나무 숲속으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그녀는 즉사했다.

주로 스캔들을 상세하게 보도하는 찌라시들이 감지덕지 그 사건에 덤벼들었다. 자살 사건, 바람에 날려간 흥미로운 경로, 한때 전도 양양했고 미모도 뛰어났던 여류 블로거의 이야기라는 사실은 보도할 가치가 아주 높았다. 그녀의 블로그는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보였으며 기자들은 환상적인 스샷을 찍을 수 있었다. 외계어와 욕설로 작성된 수많은 포스트들, 그림판으로 낙서가 되어 있는 그림들, 포스트마다 달려 있는 악플들, 수많은 깨어진 링크들, 심지어 사이트 한 구석에는 스파이웨어 로봇도 있었다! 그 사건은 순식간에 올블블코 탑이 되었다.
앞에서 말한 평론가는 젊은 여인이 그렇게 끔찍하게 삶을 마감한 것에 대해 당혹감을 표현하는 단편을 자신의 블로그에 포스팅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거듭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 이것은 남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또 한번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포스트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덧글

  • 마고 2004/10/26 18:09 # 답글

    아, 너무재밌네요...많이 웃고갑니다^^
  • 지블 2004/10/26 18:19 # 삭제 답글

    파트리크 쥐스킨트 저도 정말 좋아하는 작가중 한명입니다. ^^;
    좀머씨이야기에서 부터 시작해서, 비둘기, 향수, 콘트라베이스, 깊이에의 강요...까지.. 근데 깊이에의 강요는 저와 표지가 틀리네요 ;ㅁ; 제것보다 더 이쁜 ;ㅁ;
    그나저나, 깊이에의 강요가 재밌는 이야기는 아닐텐데 ^^;
  • 마고 2004/10/26 18:24 # 답글

    재밌는얘기는아닌데 재밌네요..그게 패러디의본질아닙니까,훗.
  • anakin 2004/10/26 19:02 # 답글

    지블 님 // 쥐스킨트 팬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아 그리고 저 표지는 제가 갖고 있는 것과 색깔이 약간 달라요;; 제껀 흰색인데 흰 표지 그림이 없는 바람에 그냥 저거를 올렸죠.
    마고 님 // 패러디에 관한 날카로운 지적이군요. 즐겁게 읽으셨다니 저도 기분 좋습니다. ^^
  • 지블 2004/10/26 21:36 # 삭제 답글

    ^^;; 패러디는 즐겁지요 >ㅁ<
    아, 저도 표지가 흰색이랍니다. +_+
  • mayura 2004/10/26 22:20 # 답글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율배반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긍정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킬지 부정적인 반향을 일으킬지는 아무도 모르지만요. 그래서 쥐스킨트의 이야기는 재밌게는 보지만 반쯤만 공감하게돼요.
    그나저나 블로그버젼은 ..굉장하군요^^;;
  • anakin 2004/10/27 09:08 # 답글

    지블 님 // 앗 그러시군요;; 흰색..도 나름대로 이뻐요^^
    mayura 님 //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의식하지 않고 살기는 힘들겠지만 의식하는 정도는 사람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는 것 같아요.
    딸기케ㅤㅇㅣㅋ 님 // 황송합니다! 꾸벅 (__)
  • anakin 2004/10/27 09:11 # 답글

    아..그리고 위 패러디를 재미있게 보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리고요, 저 글이 재미있다면 그것은 패러디 대상인 원본 글이 워낙 훌륭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네요. 쥐스킨트의 위대한 글솜씨에 경의를!
  • 바람조각 2004/11/04 21:57 # 삭제 답글

    <향수>를 읽고 정말 단번에, 쥐스킨트 팬이 되어버렸습니다.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라는 글에서도 나오죠. 영화 계약만 하면 떼돈이 들어오는데도 기피하는. 그야말로 '괴짜천재'의 매력이랄까요.

    잘보고 갑니다 ^^;
  • anakin 2004/11/04 22:56 # 답글

    바람조각 님 // 향수 정말 최고죠. -o-)=b 괴짜천재.. 그래도 그의 소설들이 소수나마 출판되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
  • cannes 2004/11/09 01:33 # 답글


    쥐스킨트 책은 다 가지고 있는데 처음 읽었던 작품이 '좀머씨 이야기'였어요. 그 책 구입한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선물받았던 것도 아니고 다른 물건을 샀더니 덤으로 주더군요. '덤'으로 받았다니 아쉬운 시작이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깊이에의 강요같은 단편을 읽고나면 그 여운이 베르나르의 신간이 나오는 주기보다 배는 더 길어요. 읽고 난 후의 호흡이 길고 차분해지는 그런 이야기들.

    잘 읽었습니다. ^_^
  • anakin 2004/11/09 09:01 # 답글

    cannes 님 // 아아.. 좀머씨 이야기는 분량상으로는 다른 물건의 '덤'이 될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내용과 깊이 면에서는 웬만한 장편 못지않은 아름다운 여운이 있죠. '덤'으로 참 좋은 책을 받으셨네요^^ 쥐스킨트의 단편들은 정말 강렬하고 놀라운 통찰력을 지니고 있어요.
    즐겁게 읽으셨다니 저도 기분 좋습니다. :)
  • inuit 2006/04/09 22:48 # 삭제 답글

    트랙백 보고 왔습니다.
    패러디가 꽤나 재미있네요. 의미심장하기도 하고. ^^
  • anakin 2006/04/09 23:49 # 답글

    inuit 님 // 감사합니다. 사실 뭔가 심오한 생각을 갖고 썼던 건 아닌데, inuit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유사한 점이 있는 것 같아서요. 제가 쓴 글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 응제 2006/10/18 22:30 # 삭제 답글

    많이 읽고 싶었던 책이었습니다.
    좋은 내용 잘 읽고 갑니다. 그리고, 일부내용은 제 블로그에 담아가겠습니다. 꾸벅~
  • anakin 2006/10/19 15:18 # 답글

    응제 님 // 즐겁게 읽으셨다니 저도 기분 좋네요 ^^ 출처를 명시한 인용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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